조 운 으로도 알려진 조 자룡은 중국 역사 소설 삼국지의 로맨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그는 장군 유비를 섬기는 장군이며 그의 가장 신뢰하고 충성스러운 추종자 중 하나가 됩니다.
조 자룡은 잘 생기고 영웅적인 외모로 키가 크고 강하다고 묘사됩니다. 그는 승마와 양궁에 대한 전문 지식을 포함하여 무술 실력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종종 녹색 로브를 입고 그의 대표적인 무기가 된 긴 창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소설에서 조자룡은 유비의 어린 아들 유선을 위험에서 구할 때 처음 등장합니다. 조운의 용기와 충성심에 깊은 인상을 받은 유비는 그에게 군대에 입대할 것을 요청합니다. 조자룡은 유비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 중 한 명이 되어 소설 전반에 걸쳐 유비를 충실히 섬깁니다.
태자인 유선을 구한 것이 실질적으로 조운이 생전에 세운 가장 큰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자를 구한 것이 무슨 큰 공인가?"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왕정시대에서 적장자의 의미는 굉장히 중요하며, 더군다나 형주에 터전을 잡기전에 전국을 유랑하며 계속 가족을 구성하고 잃고를 반복했던 유비를 생각한다면 이 공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오호대장군의 공로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조자룡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장판파 방어입니다. 전투 중에 유비의 군대는 적에게 쫓기는 좁은 다리를 건너 도망쳐야 합니다. 조자룡은 적군을 막기 위해 뒤에 남아 유비와 그의 군대가 탈출하도록 허용합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운는 용감하게 싸우고유비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적을 막아냅니다.
조자룡과 관련된 또 다른 유명한 이야기는 적 장군 조조로부터 유비의 아내를 구한 것입니다. 유비의 진영이 공격을 받으면 그의 아내는 조조의 군대에 잡혔습니다. 조자룡은 메신저로 변장하고 조조의 캠프에 잠입하여 아내를 구하고 탈출을 돕습니다.
소설 전체에서 조자룡은 충성심, 용기 및 무술의 모범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소설 속 인물들과 독자들 모두에게 널리 찬사를 받으며 중국 문화에서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이 끝나고 그 이듬해인 229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늙은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골병이 들어 사망한듯 보입니다..그래도 중국역사에 나오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전장에서 싸우다 피 흘려 죽거나 적에게 붙잡혀 참수되거나 부하에게 암살 당하는 등의 흉살은 아니고 자연사하여 비교적 잘 죽은 듯합니다..그리고 조운의 사망을 언급해서 후출사표의 위작설이 제기되는데 228년작 후출사표에 229년의 조운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가 죽고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습니다. 별전을 보면, 유선이 조운은 유비를 따르면서 공적이 컸고 자신이 아기였을 적에 구해 줬으니 조운의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했습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조운의 시호를 지어다가 붙인 사람이 바로 강유로 강유는 조운의 시호를 제정할 때 당양에서의 일을 조운의 대표 일화로 소개한되었습니다. 강유는 시법을 살펴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운(趙雲)은 자(字)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의 세력에 속했는데 공손찬이 유비에게 전해를 도와 원소를 막게 하니 조운이 이에 수종(隨從)하여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유비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유선과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유비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건흥 원년(223년)에 후주는 조운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년(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면서 야곡도(斜谷道)로 행군하겠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자 조진이 대군을 보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에게 명해 이것을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의 군세는 강해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됐다. 건흥 7년(229년)에 죽었다.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관우, 장비, 마초의 평 이후) 황충과 조운은 굳세고 용맹해 아울러 조아(爪牙=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됐으니 관(灌), 등(滕)의 무리로다. |